[문학단상] 과연 희생은 언제나 '선' 일까?

생활문화 /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2025-10-24 15:50:42
동화와 소설 속 희생 서사는 환각 자아내
일방적 혹은 굴욕적이지 않은 관계 가꿔야
(출처=Unsplash의 Johannes Plenio)

우리는 어릴 적부터 '주는 것'을 배웠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행복하다고. 나눔과 베풂은 언제나 좋은 말로 들린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슬픈 자기기만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과연 희생은 언제나 선일까?
 
◇ 신데렐라 이야기는 슬프고 잔혹해

우리는 동화에서 극단적인 희생을 배운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그것이다. 신데렐라는 참는다. 구박을 견디고 묵묵히 희생한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신데렐라는 결국 왕자의 사랑으로 보상받는다. 그 결말은 극적이지만 그 안에는 굴종적 여성상과 수동적 희생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누군가의 구원을 약속하는 순종적 희생, 그것을 덕목으로 학습하는 구조, 이것이 이른바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아닐까?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소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다. 푸름과 열매와 시원한 그늘, 자신의 존재 전체를 내어준다. 가지와 몸통마저 베임 당하고 결국 그루터기만 남는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아, 그러나 조금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일방적으로 착취당한 나무의 침묵과 희생을 '숭고한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그 나무를 거룩하게 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착취를 망각하고 그 관계를 낭만화하게 된다. 소멸과 파괴로 치닫는 갈취를 미화하고 의미화하는 방식은 통속적 스토리텔링이 자아내는 환각이 아닐 수 없다.

◇ 의존하고 맞추기만 하면 상처만 남아

철학은 오래 전부터 이를 경고했다. 현대 철학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란 개념으로 관계를 해부한다. 알다시피 사디즘은 타인을 지배하려는 경향이며, 마조히즘은 의존적이고 자신을 굴욕적으로 내어주는 관계 유형이다. 오염된 용어를 바로 잡도록 하자. 두 용어의 철학적 용법은 성애(sexuality)가 아니라 상호관계를 맺는 방식과 태도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쪽은 늘 지배하고 한쪽은 늘 순응한다. 하나는 갑이고 하나는 을이다. 을은 맞춰주고 숭배하고 의존하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변질된 형태로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설명했다. 프롬에 의하면 마조히즘적 사랑은 "자신보다 강하다고 느끼는 다른 사람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자신의 자아, 자발성, 온전함을 포기한다." 이러한 관계에는 자아 포기, 의존성, 우상숭배적 태도가 현저하다. 반면 프롬은 사디즘적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집어삼켜서 의지라고는 없는 도구로 만들어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는 욕망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지배적이고 정복적이며 소유지향적이다.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p.107-108

늘 참고 견디고 퍼주기만 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그걸 아낌없는 사랑이나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굴종이 되거나 가스라이팅의 일종이기도 하고, 결국은 상대방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지워버리는 행위를 과연 건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런 일은 드라마처럼 흔하고 흔하다. 아낌없이 베풀고 마음 다해 헌신하는데 정작 타자에 의해 이용만 당하고 결국에는 상처만 남게 되는 그런 빤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 슬픈 장면을 문학작품 속에서 목격하게 된다면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 속에서라면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나? 너무 착해서 문제다.

◇ 자신을 잃지 않고 호혜적으로

최근 종로인문학당에서 국제개발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국제개발 현장에서 일방적인 퍼주기와 시혜적 나눔은 권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파트너십 모델'을 추구한다. 공동체 혹은 지역을 개발(development)하도록 지원하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운영되도록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다른 쪽은 언제나 받기만 하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일방성과 의존성을 넘어서고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요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정무역 커피 이야기가 그렇다. 빵과 현금을 주는 대신, 커피 원두를 직접 구매한다. 서로의 필요와 자원을 교환하며 농민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이는 시혜가 아니라 호혜적 관계다. 나눔과 도움이 상호적일 때 생명력과 지속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금 지구촌에는 환대라는 화두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국적이 없는 자, 권리 없는 자, 고향을 떠난 자들은 환대하는 나라들과 이주민 정책을 통해 삶을 열어갈 수 있다. 환대에는 관계성의 심층을 보여주는 차원이 있다. 그것은 환대하는 이의 주체성과 능동성이다. 환대하는 자는 자기 집이 있다. 그리고 그 문을 굳게 닫지 않는다. 타자의 호소를 듣고 영접하고 식탁을 나눌 줄 안다. 유랑을 끝내고 자립하여 생존하도록 돕기도 한다. 이처럼 진정한 나눔과 환대는 자기됨을 지킨다. 환대는 소모적 희생이나 자기 파괴가 아니다. 서로를 채우는 법을 안다.

미덕으로서 나눔과 관대함은 좋은 가치가 될 수 있다. 허나 늘 희생하기만 하고 이용당하고 자기를 내어주기만 한다면 결코 칭찬할 일이 아니다. 일방적이거나 파괴성을 지닌 관계엔 언제나 힘의 불균형과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외교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관계는 일방적이거나 굴욕적이지 않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상생하게 해내는 그런 역량과 상호관계가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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